노숙자

2012. 5. 3. 12:02나를 위한 위로






델리에서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무모한 모험을 감행했다. 중간 중간 로컬 기차와 로컬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향하기로 한 것이다.

알라하바드를 지나칠때 즈음이었다. 인도의 날씨는 10월에도 여전히 더웠고, 로컬 버스에 내려 알라하바드에서는 야간 로컬 기차를 타고 바라나시로 일단 가기로 작정했다. 갠지스를 끼고 계속 동쪽으로 향하던 곳, 일라바드역. 역 내부에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가득차있었고, 더위와 사람들의 열기로 땀이 벌써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더위와 인산인해를 피해 알라하바드 근교를 구경하기로 작정했다. 야간 기차시간은 새벽 3시 30분에 일라바드를 거쳐간다고 했으니 그야 말로 밤을 세어야 했던 날이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던 곳에서 잊을 수 없는 냄새가 나의 코를 깊히 자극하고 있었다. 잠시 길을 멈춘 후 그 냄새가 어떤 냄새인지 나의 머릿속에선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고 또 발원지가 궁금했다. 이윽고 찾아낸 냄새의 발원지는 검은 다리에 수 많은 파리가 한 다리를 점령군처럼 차지하고 있던 한 사내였다.

냄새는 시각의 기억보다 어쩌면 더욱 강한 기억 저장력을 제공하고 있다. 사람의 몸이 썩어가는 그 냄새. 우연하게 맡아보았던 그 냄새가 생명이 붙어 있는 어느 늙은 노숙자의 몸에서 나고 있었다. 살아있는지 숨이 붙어 있는지도 궁금했지다. 다행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어렵게 응시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덥고 있던 숄에서 어렵게 몸을 움직였다. 다리에 붙어 있는 파리들은 한 순간에 또 사라졌다. 파리가 썩어가는 다리에 앉아 있는데 그것을 쫓을 힘도 없는 그가 나의 눈과 마주치고 움직인 이유가 무엇일까?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을때 산송장이란 말이 딱 어울렸다.

그는 내가 가까이 왔을때 '다스 루피아 다스 루피아'를 외쳤다. 

이 사람도 구걸의 법칙 10루피를 외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밥도 먹지 못했을 것이고, 움직이기도 힘들 그였을텐데 단 10루피를 원하던 그.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왜 당신은 돈을 얻으려고 합니까?"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며칠을 먹지 못했지요. 하지만 먹는 것보다 내가 죽어 내 시신을 갠지스에 보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해요. 도와 주세요"


그는 한끼를 먹기 위해 구걸했던 것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을 위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살아가며 늘 더 큰 꿈을 꾸고 현재의 자신의 삶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꿈을 꾸고 노력했지,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삶을 하나의 긴 막대로 놓고 보면 한 가운데가 지금의 현실 일 것이다. 

지나간 과거의 삶이 현재의 자신의 삶을 만들었고, 또 현재 자신의 삶이 미래를 만들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이 셋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중요하고 하나의 유기체로 만들어야만 자신의 삶이 조금 더 탄탄할 수 있다는 단순한 깨달음이었다. 


그는 그 때 그의 현재의 상황은 막막했을 것이다. 과거도 말하지 못하게 처참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은 그리고 다가올 다음 생에는 고통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어 발버둥을 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500루피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서 아무도 모르게 그의 손에 전했다. 

그리고 그의 다리에서 썩어가는 냄새를 또 잊지 못하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인도의 기차는 정해진 시간을 예측하기 힘들었다. 역시나 기차는 연착을 거듭했고 아침해가 뜨고 나서야 겨우 탈 수 있었다. 

그 많은 사람은 길게 늘어선 열차의 객실에 먼저들어가려고 다시 부산해졌다. 

좌석이 보장되지 않은 이등석 객차에는 서두르면 자리를 차지하고 갈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또 목적지까지 서서 가야하는 수고를 감당해야만 했다.


어제 한 일은 오늘의 결과로, 오늘의 한 일은 내일의 결과로...


어느 하나 우리 삶에 보장이란 있을 수 없다.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과정의 자신의 인생인 것이다.




PS - 목차라는 말은 인도에서는 천국이라는 뜻입니다. 

        갠지스에 자신의 주검이 태워지고 마지막으로 재가 되어 뿌려지면 목차로 향한다는 힌두교의 교리죠.

        그는 비록 현실이 너무 절망감에 살아왔지만, 내세는 윤회의 고리를 끊어내고 좀 더 나아지기를 희망한 것입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겠습니까? 자신이 주워진 것만 보고 자신의 여유만 보고 모든 기준의 잣대를 들이대지 마세요.

        그는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고, 누가봐도 숨이 곧 끊어질 듯 보였습니다.

        그에게 있어 힘들게 나를 불러 세운 것이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누구보다 평온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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