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는 시간의 개념을 버려라.

2012. 3. 7. 04:32여행/포토에세이


강가의 아침. 수도하는 사두




새벽 안개 넘어 보이는 강가 반대편





I.

여트막한 기억을 되집어 본 적이 있는지?

나의 인도방랑은 언제나 그 기억에서 다시 시작 되었을지 모른다.
새벽의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길을 걸었다. 흐믈흐믈해진 공기들이 나의 피부, 나의 눈으로 부딪히고. 
그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고, 또 시간이라는 한정된 공간속에 내가 존재함을 인식하게 해주었다.  
왜 인도로 내 발길을 이끌게 하는지 명확하고 적확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갠지스에서 숨을 쉬고 갠지스를 신성시 하는 그들 속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이미 갠지스인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곳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치 떠있는 수많은 공기입자 처럼.

늘 나는 강가에서 같은 일만 반복한다. 남들이 일어나는 시간, 해가 뜨기 전의 시간에 일어나 살아있는 몸뚱이를 이끌고 두발로 갠지스를 걸어다는 일이었다.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냥 흘러가는 바람에 떠다니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나를 갠지스에서 맞겨둔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시간은 이미 흘러가고 그때 그 시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란 녀석은 마치 멀리서 보는 강물과 같아서 착각을 불러오게끔 만든다.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흘러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작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려 온 것이다. 잡으려고 했던 시간들, 피하고 싶었던 순간들은 언제나 오래동안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게 상처를 스스로 치유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에게 맞겨두기엔 너무 가혹했던 시간들이었다.

인도에서 시간은 오래된 기억속에 나 자신을 찾아헤메는 시간이었다.

 






뉴잘빠구리역으로 들어오는 기차




뉴잘빠구리에서 나를 다르방가역으로 데려다 줄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





II.


선택의 시간 속에 서 본적이 있는지?

한 기차는 나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고 다른 기차는 내가 가야할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같은 플랫폼에 기차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기차역의 플랫폼은 그런 숙명을 지니고 생겨났을 것이다. 모든 방향을 모두 다른 플랫폼을 만들어두기엔 현실적 이득을 생각해야만하는 현실에서 어떤 것도 충족시킬 수 없으니까.
그랬다. 나는 헷갈렸다. 어떤 기차를 타야하는지, 어디로 가는 기차를 타야하는지. 조그마한 행동으로 그것을 알수도 있었지만 포기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른 채 운명의 길을 선택하기로.

 기차는 예정된 시각에서 약 2시간이 늦게 플랫폼을 향해 다가 오고 있었다. 기차가 나를 허락했는지 일단 가는 방향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내가 가야할 방향으로 들어오는 기차에 몸을 맞겼고, 또 기차는 하염없은 시간의 터널을 비집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과연 이 길이 맞을까? 어디론가 향하는 기차에게 아무 말 없이 무한한 신뢰만을 보내며.
인도의 기차는 또 요란하다. 시끄럽다. 인도를 여행할 때 가차만 타고 인도를 마치 다 둘러 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 안에, 혹 그 기차 안에 여행의 본질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순하지만 여행의 본질은 내가 숨쉬고 살아가야만 하는 본질과 대동소이했다.
그렇게 나는 한 때 티켓도 확인 하지 않은 채 아코르행 기차에 몸을 싣고 내 운명을 기다렸을지도.

때로는 우리에게 선택의 기로에 놓일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머리속의 생각으로 이것이 유리할지 저것이 유리할지 다투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수 많은 선택을 헤야했고, 그 선택의 결과로 지금 내가 존재하는 그 공간에 내가 숨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선택이 조금 옳은 것이었다면,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혹 그 선택이 옳지 못했다면, 실망스런 표정으로.
어쩌면 정작 선택을 해야하는 본인은 아무 결정권도 없이 그냥 흐름에 맞겨버리고 자신의 미래를 모른채 흘러오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래 인도에서는 시간의 개념을 버려라.